Climbing Utility/타산지석-등반사고

12월 5일 도봉산 낭만길 실족사고 경위입니다.(펌)

마칼루2 2009. 3. 16. 11:46

12월 5일 도봉산 만장봉 낭만길 고 강진숙 악우 실족사고 경위입니다

무슨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자책감으로 고인의 유가족과 고인을 사랑했던 등반사랑 산악회 회원 및
정승권 등산학교 동문 여러분께 사고경위를 올립니다.

당시 함께 했던 동료 악우들은 아직도 깊은 심리적 공황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고 저 역시 마찬가지지만 일행을 대표해 뒤늦게나마
제가 사고당시의 상황을 되짚어보고 그 내용을 올리겠습니다.

@사고 시간과 장소

2008년 12월 5일 오후 4시 50분경
도봉산 만장봉 낭만길 릿지 루트중 네 번째 피치가 끝난 후, 다섯 번째 피치인 침니 길을
거치지 않고 여섯 번째 루트 시작지점으로 가기 위한 우회 루트인 일명 ‘물길’ 루트 중상단 부근.

@사고 상황

릿지길 가운데서도 비교적 쉬운 길이며 전반적으로 로프를 안 매고 다 함께 올라가는
계단식 ‘물길’에서 일행 다섯명이 다 함께 오르다가 두 번째로 오르던 고인이 ‘물길’
중상단 부근에서 손 혹은 발이 빠지면서(추정) ‘어’ 하는 소리와 함께 뒤쪽으로 실족 추락.
중간부분에 부딪힌 다음 바닥을 치고 다시 어프로치 길의 잡석지대를 구르고 멈춤.

@사고 이후 상황

사고가 나자마자 다시 내려온 일행이 4시 55분경 급히 도봉산 경찰구조대에 구조요청을
하고 힘들어 하면서도 일어나보려 애쓰는 부상자를 진정시키고 있는 가운데 이십여분이 지난 후
경찰구조대 도착.
일행과 경찰 구조대장의 요청으로 헬기구조를 요청했지만 날씨와 시간을 감안한 헬기측의 거부로
다시 소방서 특수구조대 출동을 요청해 놓고 경찰구조대가 구조활동 시작.
경찰구조대원들이 길이 없다시피 한 하산 길을 사고자를 업고 내려오다 안돼 다시 들것에 옮겼으나 길이 험해 사투라 표현할 만큼 두 시간여에 걸쳐 어렵고 힘들게 내려오던 중 소방서 특수구조대를 만나 부상자를 인계하고 그때까지도 신음소리를 내며 힘들어 하던 부상자를 소방서 구조대원들은 병원으로 긴급후송.
일행은 경찰구조대원들과 함께 구조대 사무실로 가 부상자에 대한 인적사항 진술과
간단한 사고상황 진술을 하고 다시 병원으로 향했으나 병원에 도착 후 고인의 사망 사실을 알게 됨.

@사고 원인분석

저는 일행과 함께 뼈저리게 반성하고 느낀 몇가지 사고원인과 아쉬운 점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사고원인으로는 기존 암벽등반을 하던 일행 모두의 어렵지 않은 릿지길에 대한
방심이 화를 부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중에서도 쉬운 우회루트인 물길을 다섯 명이 오르면서 각자 일행의 등반력을 믿고 오른 부분입니다.
낭만길 릿지를 하는 사람들은 조금 위험하다는 침니를 피해 물길을 오르면서 대부분 줄을 안 깔고 오른 다고는 하지만.
물론 볼트 하나 없는 계단식의 이 물길을 오르는 사람들은 줄을 안 깔고 오르는게 이상하지 않다 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의 경우를 생각해 줄을 깔았어야지 싶은 생각이 듭니다.

또한 등반 시작 준비 당시 일행 전원이 헬멧을 가져오긴 했지만
헬멧착용을 강제하지 않았던 점입니다.
오히려 촬영을 의식했다면 당연 헬멧착용을 강제했을 터인데
날씨도 춥고 릿지길이라 큰 상관 없다는 각자 본인의 판단에 맡기는 우를 범했다 싶습니다.
등반 정서상 본인 판단의 사항이기는 하지만 촬영을 핑계 대고라도 강제로라도 헬멧을 착용하게
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자책감이 듭니다.

헬기구조에 관한 아쉬움도 있지만...
사고즉시 구조대에 연락을 취하고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출동한 경찰구조대의
노력은 사투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다만 헬기구조를 요청했을 당시 진숙은 상반신을 일으키려 애쓰는 모습이었고
이름을 불렀을 때 대답도 하는 상황이었음을 감안하면,
당시 경찰 구조대장이 악을 쓸 정도로 헬기출동을 요청했지만 결국 헬기는 못 왔고
그 이후 경찰 구조대와 소방서 특수구조대원들이 악전고투를 하면서 고인이 병원에 도착할 때 까지
총 4시간 가까이에 이르는 구조시간을 생각하면 헬기만 떴다면 하는 아쉼움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모르는 헬기 출동에 관한 어려움이 있었기에 헬기구조가 안되었지 싶습니다.

이 모든 아쉬운 부분들은 과거의 것이 되고 말았지만 이러한 부분들이 반성되어 차후
이와 같은 사고가 없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을 가져봅니다.

@등반경위

등반 및 촬영을 위해 도봉산 낭만길을 등반하기로 하고 어프로치가 끝난 지점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유난히 추웠던 날씨 때문에 기온이 오른 후 등반을 시작하자는 의견에 따라
정오 정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각자 등반준비를 하면서 일행 다섯명(강정식 구은수 권진선 강정로 강진숙) 모두 전문 암벽등반
선등능력이 있는 중상급자 수준의 클라이머들이었기 때문에 등반기량에 대한 부담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진숙의 경우 원래 예정된 일행이 아닌 등반 전 날 밤에 산악회 행사에서 만난 강정로를 통해
합류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온 상황이어서 진숙에게는 양해를 구하고 평소 선등을 주로 했지만
라스트로 등반하길 주문했습니다.

제일 먼저 강정로가 선등을 하며 줄을 깔았고 픽스를 해놓은 후 그 줄에 권진선이 등강기를
걸어놓고 등반을 하면서 촬영도 하기로 했습니다.
그 다음은 구은수가 선등을 하고 두 번째 등반자로 강정식, 그리고 강진숙이 마지막 등반자로
줄을 묶고 등반을 시작했으며 이 시스템은 네 번째 피치를 종료할 때 까지 계속됐고 단 한명도
중간에 슬립을 먹거나 추락을 하지 않은 상황으로 등반은 이어졌습니다.

날씨는 제법 추웠고 바람은 별로 없는 편이었으며 진숙은 모처럼의 동계등반인 듯
등반 중간에 춥고 손이 시렵다는 말을 하기도 했으나 여느 동계등반과 빙벽등반이
그러하듯 추우면서도 즐거운 등반은 계속 됐습니다.
네 번째 피치까지 깔끔하게 등반을 마친 일행은 다섯 번째 피치 침니길을 등반 하려다가
날씨도 춥고 시간도 늦었으니 걸어 올라가는 우회길로 올라 그 다음 한 피치 정도를
등반하고 내려가자 의견을 모았고 우회길인 물길 밑으로 가 보온병에 담아 온 뜨거운 커피와
홍삼차 등을 마시며 대화를 나눴고 행동식도 먹었습니다.

뜨거운 차와 행동식으로 몸을 덥힌 우리 일행은 로프와 카메라 등을 배낭에 넣고
계단식으로 형성된 ‘물길’을 각각 약 1~2 미터 씩의 간격을 두고 구은수 강진숙
강정로 권진선 강정식의 순서대로 올랐습니다.

그리고는 맨 앞에서 오르던 구은수가 상단에 거의 이를 무렵 사고가 났습니다.
진숙의 사고 당시 손이 빠졌는지 발이 빠졌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각자 물길을 오르느라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볼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후의 상황은 윗부분에 서술한 그대로입니다.

당시 네 시간여에 걸친 도봉산 경찰구조대와 도봉 소방서 특수구조대원 여러분의
노력은 현장에서 함께 했던 일행을 숙연케 할 정도로 사투를 벌이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으며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고 강진숙 악우의 유족분들께 사고 당시 함께 했던 일행과 함께
깊은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고인을 사랑했던 등반사랑 산악회 회원 여러분께 깊은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항상 즐겁고 밝은 표정의 고인을 보아왔던 정승권 등산학교 교장선생님 이하 동문 여러분께
깊은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사고 당시 함께 했던 일행은 평생 떠 안고 가야할 자책감이 있다면
그것이 고인과 나누었던 또 다른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하길 빌겠습니다.

2008년 12월 31일    강정식 올림